교양과 상식

[스크랩] 대구 달성 최정산 남지장사(지장보살을 신앙하는 천년 고찰) / 2014. 2. 25(수)

영웅호걸짱 2015. 11. 21. 11:59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위치한 남지장사는 684년(신라 신문왕 4) 양개(良价) 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적 근거가 없지만, 사중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창건설이다. 양개 스님은 양한(良漢) 스님이라고도 한다. 문헌으로는『조선사찰사료』「남지장사」조에 자료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일부 문헌이 들어 있다.「고적요령(古蹟要領)」과「후지(後誌)」라는 제목으로 남지장사 연혁을 소개한 자료인데, 먼저 여기에 수록된 창건 관계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남지장사의 창건은 신라 양개조사(良价祖師)에서 비롯한다. 조사는 본래 중국 대구 사람이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의 균주(筠州)로 가서 대감(大鑑) 혜능(惠能)의 제4대 법손인 운암(雲巖)에게 법을 얻었다.
 
신문왕 4년(684)에 동쪽으로 와서 이 사찰을 짓고 가르침을 전하였다. 남지장사의 위쪽으로 수십 보쯤 가면 일층(一層)의 탑이 있는데, 이것이 양개 조사의 영골(靈骨)을 안치한 장소이다. 절 아래로 조금 떨어진 곳의 길 오른쪽으로 삼천 개의 돌로 쌓은 축대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 법을 듣던 제자들이 각각 한 개씩의 돌을 가져와 쌓은 것이라고 한다. 신라 때의 군신(君臣)들이 많은 토지와 노비들을 이 절에 주었다는 내용이 비에 새겨져 있었다. 이 비는 뒤에 궁예의 난 때 부서져 버렸다. 
 
비록 자료의 확실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위 자료는 남지장사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 전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육조 혜능의 법손인 양개가 신라 땅에 들어와 남지장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은 불교사적 의미가 큰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창건설화는 당시 상황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양개 조사의 영골이 이곳에 봉안되어 있었다거나, 그에게서 법을 들은 3,000명의 제자들이 돌을 한 개씩 가져와 축대를 쌓았다고 하는 내용 등이 그렇다.
 
여기서 소개한 양개 조사는 물론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개창자인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를 지칭한다. 그가 균주 지방으로 갔다는 내용(실제로는 양개의 출신지가 균주였음)이나, 운암(양개는 雲巖曇晟의 법을 이었음)에게 법을 전해 받았다는 내용 등이 모두 양개의 생애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양개는 신라 땅에 건너온 일이 없으며, 남지장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684년도 그의 생존 연대에서 크게 벗어난다. 따라서 이 창건설화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일단 무리가 따른다. 『조선사찰사료』에 수록된 이 자료는 대략 18세기 후반 무렵에 편찬된 일종의 사적기로 보인다. 1760년대와 1780년대에 남지장사를 크게 중창했던 모계화상(慕溪和尙) 관련 기록이 제일 후반부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는 광명루(光明樓) 오른쪽에 사적비로 추정되는 비석 2점이 있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다. 혹시 이 사적비의 내용을 옮겨 놓은 자료가 아닐지 모르겠다. 한편 광명루에는 인악 의첨(仁岳義沾, 1746∼1796) 스님이 지은 「남지장사전우소화중수기(南地藏寺殿宇塑畵重修記)」 현판이 있어 연혁 파악에 도움이 된다. 인악 스님은 팔공산과 비슬산 일대의 많은 사찰과 연관을 맺고 있는데, 역시 남지장사와 관련된 자료도 남긴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그가 지은  현판의 일부이다.
 
신해년(1791년) 봄 정월, 내가 지장사를 지나는데 전 주지인 정신(定信) 스님이(모계화상의 중창불사와 관련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며 그 일이 오른쪽에 적은 내용과 같다. 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며, ‘양개 화상은 회계(會稽) 유씨(兪氏)의 자식으로 출가하여 멀리 나라 밖에까지 다니다가 동쪽으로 와 이 사찰에 머물렀으며 이 곳에서 입적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 조사의 탑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니 이제 하나의 고적(古蹟)이 되었다. 이것의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모계 화상이나 동개 화상 같은 이에게 어찌 전후가 없겠는가. 다행히 내가 그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인악 스님은 모계 스님의 불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글을 지었다. 글의 앞부분은 이 때의 불사에 대한 사실적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남지장사의 창건과 관계된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정신(定信)이라는 전임 주지에게 전해들은 것이라는 위 인용문의 내용만 보아도 18세기 후반 무렵 남지장사에서는 양개 조사의 창건설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적어도 이 때까지 양개 조사의 부도탑과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여하튼 남지장사에서 양개 조사를 창건주로 인식하게 된 배경이라든가, 부도탑·석축 등과 관련한 내용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욱 세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 초기까지 남지장사는 그 사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도호부」조에 지장사라는 이름의 현존 사찰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인데, 특히 이 자료에는 고려의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이 지은 기문이 있었다는 내용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아직까지 김황원이 지은 기문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이 내용만으로도 남지장사의 꾸준했던 역사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창건 이후 남지장사의 연혁은 앞서 소개한 『조선사찰사료』 「남지장사」조, 그리고 『인악집』 등의 자료에 의해 일부 확인된다.
출처 :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유아독존

 

출처 : 여행
글쓴이 : Grand Be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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