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문 평양종(大同門平壤鐘)은 조선시대에 제작해 대동문
누각에 달아놓았던 종을 말한다.
이 종은 1890년대까지 평양시민들에게 비상경보와 시간을
알려 주었으며 현재의 종은 1726년 다시 만든 것으로
높이 3.1m, 직경 1.6m, 무게 13.5t이다.
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동명왕(고주몽, 혹은 추모)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에 능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는데,
뜻을 같이 했던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명왕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외적들을 물리치면서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역시 주변에 많은 왕릉들이 있다.
34명의 고려 왕 중 16명의 능(陵)이 개성에 있다.
이 중에서 왕건릉(현릉), 공민왕릉, 명릉군, 칠릉군 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머지 왕릉들은 휴전선 근처 군사지역, 몽고의 침입을 피해 잠시
수도를 옮긴 강화도 등에 분포해 있다.
살던 집으로 뒤에 왕이 된 방과(정종)와 방원(芳遠: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아들인 태조 방원이 보낸 사신들을 죽이거나
가두곤 했는데 '함흥차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국전쟁때 일부 파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하여 대부분 복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전과 이성계 조상들의 위패를
모셨던 이안전, 누각인 풍패루 등이다.
풍패루(豊沛樓)는 주위환경과 잘 조화된 2층 다락집이다.
풍패루 앞에는 넓은 연못이 있고 연못 속에는 작은 섬 하나를
만들어 놓았으며 주위에는 나무를 심어 그늘이 지게 하였다.
풍패루에서는 못 가운데 활짝 핀 연꽃을 보는 광경이 매우 훌륭하고,
잔잔한 연못 속에 풍패루의 2층 다락 그림자가 담긴 풍경이 아름답다.
(16) 북한국보 124호 개성 남대문 (開城 南大門)
1391년에 착공하여 1394년(태조 3년)에 완공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했으며, 1900년(광무 4년)에 크게 개수했다.
1950년 한국전쟁때 파괴되어 195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1393년(태조 2년)에 쌓은 석성(石城)의
정남문으로,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선죽교는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난간이 없는 다리로 알려졌으나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부가로 설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리었는데
말 그대로 '착한 땅의 다리'라는 뜻. 후일 정몽주가
이 곳에서 살해당한 후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가지가 솟구쳐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선죽(善竹)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있다는 낭설이 많아 붉은빛을 띄는 돌로
재건해서 현재는 붉은 흔적만이 남아있다.